친정집은 아직도 내가 나고 자란 그 터에 있다.
그러니까 나도 스무살 대학을 가느라 떠나기 전까지 이사를 해본 적이 없으며,
내겐 고향집을 갈 때 늘 내가 나고 자란 그 집으로 가는 것이 당연했는데,
너무 당연했기 때문에 그 사실이 흔치 않은 경우라는 걸 깨달은 건 최근 일이다.
1921년생인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전쟁 중인지 후인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1940년대 언제쯤, 이웃에게 돈 7만원을 빌려 300평 땅을 사고 집을 지어 그곳에서 팔남매를 낳아 기르셨다.
맏이가 전쟁터에서 돌아가신 후 둘째인 우리 아버지가 맏이가 되었고
그런 집에 시집 온 엄마는 최근까지도 명절 증후군을 앓을 정도로 큰 집안의 맏며느리로 평생을 살아오셨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한옥집의 넓은 앞마당에다가 새로 이층집을 짓고 살다가 최근에 그 집을 팔았다.
원래 계획은 이제 아이들도 다 결혼해서 떠나니 살던 집을 팔고 동네를 옮겨서 원룸 건물을 사서 생활비 걱정 없이 살자는 것이었는데
막상 집이 팔리고 나니 아버지는 도저히 이 터를 못떠나겠다고 하셨다.
엄마 표현으로는 한마디로 답답하게 버티셨다고 한다.
평생을 같은 동네, 한 자리에서 살아오셨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길이 가득한 그 곳을 떠나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이겠는가.
결국 부부싸움 끝에 엄마는 처음으로 아빠 말을 들어주었다.
팔고 절반 남은 땅인 뒷마당에 있던 거의 백년이 되어가는 한옥을 부수고 새로 집을 짓기로 했다.
엄마 아빠는 평생에 딱 이사를 두 번 하신 건데, 앞마당에 집을 지어서 옮긴 것과 다시 원래 나고 자란 자리로 돌아오신 거다.
결정에 있어 가장 큰 공헌은 형부였다.
아버님이 이 동네를 떠나시면 향수병 걸리십니다, 집 짓는 거 도와드릴테니 뒷마당으로 가세요....
형부의 지휘 아래 새로 집을 짓기 위해 오래된 한옥을 부수던 날, 엄마는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며 울고 있다고 했다.
왜 우냐고 물었더니 그 한옥집에서 니들 다 키우고 살았던 추억이 생각나서라고 하신다.
그러더니 몇달만에 금새 새로 집을 짓자 마자 엄마는 신나게 매주 집들이를 하느라 입술이 다 터질 지경이었다.
같은 곳에 오래 살다보니 아는 사람이 오죽 많았을까.
만나는 사람마다, 집 멋있게 새로 지었다며 인사를 했다.
그 와중에 아빠는 자신이 좋아서 하는 농사일에 여념이 없었다.
새로 지은 집 어디다 농기구를 둘 것인지, 직접 심으신 농작물이 얼마나 잘 자라고 있는지에만 관심을 두신다.
미국에서 방문한 딸이 가기 전에 새로 나오고 있는 드릅을 과연 먹일 수 있는지가 제일 큰 관심사랄까.
새벽부터 눈 떠서 밭에 나가 매일 기르는 농작물을 살피고
점심때면 동네의 오랜 친구와 칼국수를 사먹기도 하신다.
만약 이사를 해서 다른 동네로 가셨다면
하루가 멀다고 다시 원래 동네를 들락거리지 않았을까
엄마 역시 아침부터 친구집이나 이웃들에게 아는 척을 하러 돌아다닌다.
가장 친한 이웃 중에는 할아버지께 돈 7만원을 빌려주신 우리 집안의 은인 가족도 있다.
그 집은 자식들 다 떠나고 적적하신 우리 부모님에게 가족이라고 해도 될만큼 단짝이다.
동네 노래 교실 회장을 하며 학교 다니듯 참석하고
저녁때면 "준비 완료"라는 친구의 메세지를 받고 호숫가나 산에 운동을 나가신다.
어떤 사람에겐 시네마 천국에서처럼 고향을 떠나봐야 그곳을 더 잘 알게 될거란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
우리 아빠처럼 평생을 같은 곳에서 같은 사람들과 같은 음식을 먹으며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더 의미있는 사람도 있다.
엄마는 괜히 아빠말을 들어줘서 월세 줬던 집 한 채를 날렸으며,
원룸 건물을 사서 갔으면 매달 생활비 꼬박꼬박 들어왔을텐데
이젠 집짓고 아들 장가보내느라 다 써버려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불평을 하신다.
그러나 나는 엄마, 아빠의 생활을 지켜 보니, 적어도 이렇게 자식들 다 떠나고 노인이 되어가는 시점에는 아빠 의견을 듣길 백만번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동네를, 오래된 집터를 안 떠나신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그러니까 돈을 잃은(?) 아니 더 못 버는 대신 일상의 행복을 얻은 것이다.
살아가면서 하는 현명한 선택은 돈을 더 버는 방향으로만 가지는 않는다.
때론 돈을 더 버는 선택보다도 "나의 행복"을 선택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물론 굶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처음 한옥의 모습, 70년대까지 이 모습이었음.
90년대에 앞마당에 지은 집, 태양열도 부착되고 정원도 예쁜 집,
뒤로 보이는 집이 기와도 바뀌고 샤시가 붙어 변형이 된 한옥집
작년에 새로 지은 집, 엄마 아빠의 손길로 정리가 되어가는 중...
이 모든 집이 다 그 300평 안에서 이루어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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