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방법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먹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방법이고, 둘째는 먹었다는 사실을 즐기는 방법입니다.
더운 여름날 하루종일 땡볕 속에서 서성이면서 야외 근무를 하느라 제대로 식사도 못한 직장인들이 늦은 퇴근길에 동네 치킨집에 들러서 노릇하게 구운 닭다리를 뜯으면서 짜릿하게 시원한 맥주 한잔을 들이킨다면, 이건 먹고 마시는 행위 자체가 즐거운 것입니다.
반면에, 처음 가본 고급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다는 송로버섯이 들어간 이름 모를 요리를, 억지로 자연스런 표정을 지으려 애쓰면서, 두 숟가락만에 비싼 요리의 접시가 비워지는 걸 쳐다보고 나서, 내가 먹은 것중에 송로버섯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했다면, 이건 아마도 나중에 두고두고 송로버섯을 먹었다는 사실을 즐기는 수 밖에는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먹고 마시는 행위와 그 사실을 기억하는 것, 양쪽 모두를 즐길 수 있는 경우도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소개할 힐 팜스테드 맥주 양조장 (Hill Farmstead Brewery) 처럼 말입니다.
출처 : http://www.ratebeer.com
요새 미국 맥주 애호가들 사이의 유행은 크래프트 비어 또는 마이크로 브루어리라고 불리는 소규모 양조장입니다. 맥주 원조격쯤 되는 독일, 벨기에, 체코등등에서라면 각 지역별 소규모 양조장이 있는게 너무도 흔하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버드와이저, 밀러, 쿠어스 같은 대형 맥주 회사의 획일적인 미국식 라거 맥주에 익숙한 미국인들에게 이러한 크래프트 비어는 그렇게 오래된 유행은 아닙니다.
Hill Farmstead 는 버몬트 주 북부에 위치한 소규모 맥주 양조장입니다. 2010년에 설립이 되었으며, 바로 다음해인 2011년에, ratebeer.com 웹사이트에서 최고의 새로운 브루어리로 선정이 되었으며, 그 이후로 2016년까지 전 세계 최고의 브루어리로 매년 선정되었습니다. (2013년에는 2위.)
이렇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Hill Farmstead 맥주를 즐기는데는 큰 장애물이 하나 있습니다. 대부분의 버몬트 소재 마이크로 브루어리들이 그렇듯이, Hill Farmstead 또한 소규모 생산이라는 고집을 지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보니, 이 맥주를 마시고 싶어도 구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Hill Farmstead 맥주를 마시는 방법은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Hill Farmstead 맥주를 공급받아서 판매하는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하는 방법.
둘째는 Hill Farmstead 양조장으로 직접 찾아가서 맥주를 구매하는 방법.
이중 첫째 방법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습니다. Hill Farmstead 홈페이지에서 맥주를 공급하는 식당 목록을 찾아봤자, 대부분 양조장 근처의 버몬트 식당들 뿐인데다가, 직접 식당을 방문한다고 해도 Hill Farmstead 맥주의 재고가 남아있지 않을 가능성이 워낙 높다고 합니다. 인기에 비해서 워낙 적은 양만을 공급하기 때문에, 정해진 요일에 해당 식당을 방문하지 않으면, 바로 매진이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뉴욕, 보스톤같은 대도시의 일부 식당에도 공급이 된다고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금방 매진이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두번째 방법인 "직접 양조장을 찾아간다"는 방법이 더 쉬워보입니다....당신이 자동차 운전하는걸 사랑하다면.
Hill Farmstead 양조장이 위치한 Greensboro 는 버몬트 주의 북부에 위치한 산골 마을입니다. 근처에 버몬트 최대의 도시인 Burlington 이 있긴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대도시라면, 그나마 가장 가까운게 보스톤입니다. 보스톤에서 3시간 가량 고속도로를 운전해서 버몬트 북부까지 올라간 다음에, 위의 사진에 보이는 시골길을 한시간 가량 운전 해야 Hill Farmstead 양조장까지 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시골길의 절반 가량은 비포장 도로.
나는 별 생각없이 길을 나서는 바람에 예상하지 못한 눈길을 달려야 했지만, 다음에 또 간다면 겨울에 가는것은 피하고 싶군요.
드문드문 농가가 나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들과 숲 밖에 안보이는 산길을 30분 정도 올라가면서, 가장 큰 문제는 과연 구글 네이게이션이 제대로 길을 안내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조금씩 든다는 점입니다. 아니, 네비게이션 보다는, 오늘 양조장이 문을 닫은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더 크게 들었습니다.
마주쳐오던 승용차 한대가 눈길에 미끄러지기라도 한건지, 내 차에 거의 부딪히듯이 스쳐지나간 것을 제외하면, 주위에 사람도 차도 전혀 보이지 않는 길을 외롭게 운전하면서, 장소와 시간 둘 중에 하나는 잘못된거 같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할쯤에, 갑자기 넓은 들판에 수많은 자동차가 주차된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주차된 자동차들 사이에, 위의 사진 처럼 작은 판대기에 지워져가는 페인트로 내가 원하는 장소에 도달했음을 알려주는 허름한 표지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더 허름한 표지판으로 OPEN 이라고 써있는 것을 보고, 내가 시간 또한 놓치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제가 사는 뉴햄셔도 그렇지만, 버몬트도 픽업트럭이 승용차 만큼 많이 보입니다. 이런 눈 덮인 산길을 달려서 술을 받아오려면 집집 마다 트럭 한대 마련하는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겠죠.
두 개의 건물이 보입니다. 왼쪽 건물에는 RETAIL 이라는 글씨가 눈에 띕니다.
왼쪽 건물 RETAIL 은 병맥주를 파는 곳이고, 오른쪽 건물은 생맥주를 파는 곳입니다.
우선 오른쪽 건물로 들어갑니다.
건물 출입문에서 우선 번호표를 뽑고 들어가면 됩니다.
이곳에서 생맥주를 마시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직접 잔에 따라서 파는 맥주를 주문해서 여기서 마시는 방법과, 맥주병 ( growler )에 담아서 가져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잔에 따라서 파는 생맥주를 사서 마시려면 1번 창구 앞에 줄을 서면 됩니다. 1인당 두 잔까지 살수 있으며, 건물안에 생굴과 치즈를 파는 아저씨도 있으니, 안주를 사서 그 자리에서 즐기면 됩니다. 여름에는 건물 밖 풀밭에 푸드 트럭도 온다고 하던데, 겨울에는 아무것도 없더군요.
생각해보니, 여기를 올라올때 무리하게 운전을 하면서 미끄러져 지나쳐간 운전자는 아마도 여기에서 2잔을 드시고 살짝 기분이 좋아지신 모양입니다. 눈길에서 그렇게 위험한 속도를 내려면 아무래도 알콜이 좀 필요하겠죠.
저는 눈길에서 운전하면서 신나게 미끄러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으므로, growler 에 맥주를 담아가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2번부터 4번까지 창구는 growler 에 맥주를 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창구이며, 이 때는 줄을 설 필요없이 아까 출입문에서 뽑은 번호표를 이용해서 대기하면 됩니다. 전광판에 내 번호가 뜨면 바텐더에게 주문을 하면 됩니다.
growler 가 있으면 그것을 가져가서 채워달라고 주문을 하면 되고, 만약 growler 가 없으면 바텐더가 알아서 새거를 내줍니다. 물론 growler 가격은 유료입니다. 750ml 짜리는 $3이고, 2리터 짜리는 $10 입니다.
바텐더에게가서 tasting 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 작은 잔에 공짜로 맥주를 한모금 따라줍니다. 테이스팅할때는 Edward 또는 Double Galaxy 를 추천합니다.
내 번호가 전광판에 뜨기를 기다리면서 서성이다보니, 한쪽 창문으로 맥주 만드는 과정이 슬쩍 보입니다.
Hill Farmstead 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힐(Hill) 씨네 농장" 쯤 되겠습니다.
이곳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Hill 이라는 성을 가진 가족들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농장을 운영하던 Hill 씨 집안의 젊은 아들이었던 숀 힐 (Shuan Hill) 이라는 사람은 어렸을때부터 집에서 취미삼아 맥주를 직접 담그는일에 재미를 붙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학 졸업후에 근처의 소규모 양조장에서 맥주 만드는 일을 배우다가, 좀 더 깊이 있게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고 덴마크에서 맥주 담그는 일을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 후로 고향에 돌아와서 직접 자신의 가족들을 동원해서 만든 양조장이 바로 Hill Farmstead 입니다.
가족이 운영하는 양조장이라서 그런지, 여기서 파는 맥주들에는 평범한 미국인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Edward, Susan, Anna 이런식인데요, 이런 평범한 이름은 주로 가족들의 이름을 따라서 지은 것이라고 하네요.
그동안 배운 맥주 지식과 더불어 몇가지 실험을 덧붙여서 그는 자신만의 맥주 제조법을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맥주에 독특한 향을 더 추가하기 위해서 와인을 숙성시켰던 오크통을 이용해본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 날은,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거의 한시간을 기다려서야 내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이런 산골에 맥주를 마시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게 참 신기하더군요.
Hill Farmstead 에서 만드는 맥주는 종류가 매우 다양합니다만, 그걸 모두 주문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매주?) 생산하는 술의 종류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메뉴판을 보면 growler 로 파는 맥주, 잔으로 파는 맥주, 병으로 파는 맥주가 각각 5~6 가지씩 적혀있습니다.
저는 일단 생맥주 3종류를 작은 사이즈 growler 로 주문했습니다. 바텐더가 알아서 growler 가격을 추가해서 카드 결재를 한후에 새 growler를 꺼내서 맥주를 따라 줍니다. (아멕스 카드는 안받는다고 하더군요.)
제가 주문한 생맥주는 이곳의 가장 대표적인 맥주인 Edward , Everett, Double Galaxy 입니다. Growler 에 tag 를 붙여서 맥주 종류를 알려줍니다.
가장 저렴한 Edward 가 750ml 에 $7 이므로 growler 를 포함해서 한병에 최소 $10 입니다. 여기에 세금을 포함하면, 맥주 한병 가격이 거의 와인 한병 가격과 맞먹네요.
생맥주는 효모가 살아있기 때문에 1주일 이내에 마실것을 권장한다고 합니다.
먼 곳까지 힘들게 와서, 오래 기다린 끝에 드디어 손에 넣은 Hill Farmstead 맥주. 아직 마시지도 안았는데, 먹었다는 사실을 추억할수 있을만큼 충분히 고생했습니다.
이번에는 RETAIL 표지판이 붙어있는 옆건물로 들어갑니다.
건물에 들어서니 와인을 숙성시키던 오크통이라고 짐작되는 통들이 잔뜩 보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Hill Farmstead 의 다양한 비결중에 하나가 이것인거 같네요.
이곳에서는 병입이 된 병맥주를 구매할 수가 있습니다. 생맥주가 아니므로 오래동안 보관이 가능한 맥주들입니다.
바텐더가 직접 맥주를 하나하나 따라주는게 아니라, 이미 병입이 완료된 맥주를 구매하면 되므로, 줄은 길지만 기다리는 시간은 짧습니다. 결론적으로 병맥주는 생맥주에 비해서 그닥 감동은 없으므로 생맥주를 추천합니다.
이 날 구매한 맥주들은 생맥주 3종류, 병맥주 3종류. 모두 13병을 구매했습니다.
다시 산길을 한시간 고속도로를 2시간 넘게 달려서 집으로 도착하자마자, 생맥주 병을 따기 시작합니다.
Hill Farmstead 의 가장 대표적인 맥주인 Edward 입니다. 종류는 American Pale Ale 이며 생맥주입니다.
Edward 는 숀 힐의 할아버지 이름이라고 하네요. 5.2도의 평범한 도수의 평범한 에일을 기대하면서 한모금 마셨는데.....
다양한 향이 쏟아집니다. 오렌지 주스가 연상될만큼 풍부한 citrus 향이 감도는 에일입니다.
근데, 이렇게 citrus 가 강한 맥주들은 대개 뒷맛이 저렴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흔한데, Edward 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코에 씁쓸한 잔향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목구멍 뒤로 사라집니다.
한 마디로, 첫맛은 크래프트 비어답게 개성이 강하지만, 입안에서 매우 고급스럽게 사라집니다.
술을 거의 못마시는 아내도 한번 마셔보다니, 이것만은 꼭 마셔야겠다면서 자꾸 뺏어마셔서, 더욱 잽싸게 사라져버린 한병입니다.
근데, 이런 특징은 Edward 만의 특징이 아니라, Hill Farmstead 에서 파는 모든 맥주의 특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두번째 사진은 Double Galaxy 라는 이름의 Imperial Pale Ale 입니다. 아마도 요새 미국에서 맥주 애호가 사이게 가장 인기있는 맥주 종류중에 한가지라면 바로 Imperial Pale Ale 이 아닐까 하는데요. 이런 맥주를 다른 말로 Americal Double 또는 Imperial IPA 라고도 부릅니다. 미국 맥주 애호가 사이에서 유명한 DogFish 90 minute / 120 minute 등이 바로 Imperial IPA 에 속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Edward 가 citrus 향이 풍부하게 흘러넘치는 느낌이라면, Double Galaxy 는 Edward 와 비슷한 향이 입안에서 아예 폭발을 하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뒷맛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것도 동일합니다. 알콜 도수는 7.8도.
Everett 은 American Porter 맥주입니다. 쉽게 말해서 미국식 흑맥주입니다. Everett 은 숀 힐의 할아버지의 형제, 즉 종조부님의 이름이라고 하네요.
황금색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품을 보기만 해도 군침이 고이는 이 맥주는 쵸콜렛과 커피향이 풍부한 부드러운 흑맥주입니다. 흑맥주답게 뒷맛이 약간 씁쓸하게 남기는 합니다만, 그냥 단순히 씁쓸한 향이 아니라, 살짝 달콤한 향이 섞여서 부드럽게 느껴지는 쓴맛입니다.
알콜 도수는 7.5도 정도라서 약간 도수가 있는 편입니다. 뉴잉글랜드의 추운 겨울 날씨에 바깥에서 얼어붙은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와서, 벽난로 앞에 자리잡고 Everett 을 한잔 마시자면, 약간 사치스럽게 몸을 녹이는거 같은 기분이 들면서, 이걸 마시는 순간과 이걸 마신 기억, 양쪽 모두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련 포스팅>
2018/03/14 - [미국&영어] - 미국 맥주는 왜 ?
'여행 > 뉴잉글랜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스톤 일본 우동집 유메 가 아루카라(Yume Ga AruKara) (0) | 2018.04.16 |
---|---|
보스톤 노스 엔드 The Daily Catch (0) | 2017.10.16 |
6) 보스톤 뮤지엄 (0) | 2017.02.11 |
날이 적당한 어느 날, 버몬트 나들이(맥주,하노버, 벤앤제리아이스크림) (0) | 2017.02.06 |
5) 보스톤 MIT 근처 (0) | 2017.01.27 |